조선 정부는 떠 넣어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군국주의화와 청의 몰락은 논란이 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조선 무능론만 대비 일본의 군국주의 읽지 못한 조선 청나라의 속국 정책에 크게 반발 대한제국 뒤늦은 개혁정책 한계 학계와 시민사회 인식차 좁혀야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었던 구한말1894~95년 청·일 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언론인 조르주 비고가 묘사한 당시 한반도 주변 상황.
김옥균의 생각은 루쉰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조선 왕의 지위를 자신과 같은 지위.미국·러시아와의 외교를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아무리 이웃 나라 정부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더라도 왕비를 죽이고.어떻게 보면 냉전체제에서 약소국들이 미국과 소련에 편승했던 것과 유사했다.
정치권에서 제기된 식민지 책임론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최근 정치권에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제기되었다.
내부 문제로 무너져가고 있었던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도와줄 수 없었다.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자금 수사 요구의 불수용을 통한 민주선거의 보장 역시 지역과 진영.
민주화 조직(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위로부터의 강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요구가 분출하는 민주정부의 교체와 함께 선진국 진입을 이루었으니 한국민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패배 후 출국할 때는 현지 대사에게 최고 예우를 지시하였다.군사권위주의 시기에 빈곤국가에서 중진국으로 도약한 데 이은 일대 성취였다.